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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아픔 가까운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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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564회 작성일 19-04-02 02:31

본문

출처: http://cafe.daum.net/kimhongbin/L98U/11

2017.02.25.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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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아픔 가까운 행복


경기도 의정부에서 준비한 1992년 낭가파르밧(8,125m) 원정대의 대원으로 대구계명대학교 83학번 故최병수 동기와 같이 선발되어서 등반준비를 하던 중 1991년 대구. 경북 학생산악연맹에서 데날리(매킨리) 원정을 준비한다며 함께 가자는 동기의 권유로 계획에 없던 매킨리 등반을 준비하게 되고 광주에서 함께 등반할 대원을 찾아보았지만 빠듯한 일정과 미국 비자신청 때문에 혼자서 등반준비를 하게 되고 같이 합류하여 출발하기로 되었으나 비자발급 서류가 복잡한 관계로 4월 25일 접수를 하여 30일 비자가 늦게 나오는 바람에 대구. 경북 학생산악연맹원정팀은 먼저 출발을 하고, 1991년 대한산악연맹에서 주최한 가을 시즌 시샤팡마(8,027m). 초오유(8,201m) 연속등반 원정등반대에 선발되어 있어서 등반 준비과정에서 알게 된 서울 청화산악회의 매킨리원정 지원대로 들어갈 이규환 선배님과 동행을 하게 되면서 며칠 더 늦은 5월 13일 13시 25분 비행기로 시애틀을 거쳐 알래스카로 들어가는 비행기를 어렵사리 예약할 수 있었다.

이번 등반은 계획된 것은 아니지만 1990년 대한산악연맹에서 주최한 낭가파르밧(8,125m) 등반 중 8,000m급 14좌의 꿈을 꾸었다. 그리고 89, 90년 2번의 8,000m급 등반 과정에서 원정에 과다한 짐의 문제점을 느끼고 불필요한 장비, 식량의 경량 등반을 고민하게 되면서 혼자서 나서는 등반이기에 그동안 마음속으로만 생각했던 경량 등반을 실천해보고 싶어 쌀과 김치, 밑반찬은 모두 뺐다. 김주형, 윤중현, 정우연 후배들이 함께 도와주었다.

 

1991년 5월 13일

아침 일찍 일어나 광주에서 구입하지 못한 몇 가지 식량을 서울에서 구입하고 공항셔틀버스로 이동하는데 우연찮게 후배 중현이를 만났다. 권순호, 장봉완형님과 주형이가 김포공항에 배웅을 나와 잘 다녀오라는 격려를 해준다.

기내에서 이선배님과 서로의 등반 일정과 계획, 자료를 교환하면서 지루한 비행시간을 보내고 시애틀 공항에 도착, 세관검사에서 가공식품인 라면이 문제가 되어서 실랑이를 하다 한참 후에야 통관을 마칠 수 있었다.

앵커리지 공항에 도착하니 오갑복씨가 나와 기다리고 있다.

오전에 장비와 식량을 구입하고, 탈기트나 국립공원사무실에서 매킨리등반 브리핑을 마치고 앞뒤 바퀴 옆에 스키처럼 넓은 판이 달린 경비행기를 타고 하얀 설원의 계곡을 지나 랜딩 포인트(2,134m) 눈밭에 사뿐히 착륙한다. 역시 듣던 대로 눈이 많다.

15kg의 짐은 배낭에 메고, 40kg정도의 짐은 썰매에 실고 찬득형에게 빌려간 오래된 산악 스키를 착용하고 짐을 끌고 가는데 오르막에서 스키 바인딩이 부러져 등반 첫날부터 스키가 짐이 되어버린다. 아이젠으로 갈아 신고 썰매를 끌고 오르다. 북동빙하 입구에서 등반을 마치고 내려오는 대구. 경북 학생산악연맹원정대 故최병수 동기를 만났다. 등반 내내 계속 날씨가 안 좋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필요 없다고 하는데도 자기 피켈을 주고 내려가면서 안전하게 등반하고 귀국하면 다음 등반준비를 열심히 하잖다.

갑자기 가스가 몰려오고 눈이 내리기 시작하며 화이트아웃(눈보라와 구름 눈의 난반사로 주변이 온통 하얗게 보이는 현상) 일어난다. 서둘러서 텐트를 치고 간식으로 식사를 했다. 날씨가 조금 나쁘지만 매킨리 시티(4,200m)까지는 운행을 할 수 있다.

모터사이클 힐(3,600m) 밑에 부러진 스키를 데포 시켜 놓고 매킨리 시티(4,200m)로 올라가는데 청화산악회 팀을 만났다. 이 선배님은 등반을 마치고 내려온 팀과 합류하여 함께 내려가신다. 날씨가 점차 좋아지기 시작하고 컨디션도 아주 좋다. 베이스캠프(4,200m)에 도착하니 먼저 들어온 경상대학교와 목포대학교를 만났다. 반갑지만 내 나름의 등반을 위해서 두 팀을 외면하고 싶다. 오늘은 4,800m에 짐을 데포 시키고, 국내에서부터 계획하고 선배님들께 들은 대로 혼자의 힘으로 등반을 시도하기로 결심을 하고 낭가파르밧 등반 때 내 입맛에 꼭 맞은 단팥죽과 라면 비스켓 기타 식량과 장비는 아이젠, 카라비너 1개, 스틱 1조만 준비를 해 왔다. 북동빙하를 오르면서 만난 최병수 동기가 하산 중 피켈을 혹여 모른다며 주고 간 장비가 전부다. 어제는 저녁 준비를 하는데 목포대 팀에서 저녁을 같이하자고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등반을 해보고 싶다고 해도 여기까지 와서 한 끼 식사를하는데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극구 같이 식사를 하자며 권하는 바람에 성의를 뿌리칠 수 없어서 같이 식사를 했다. 벌써 3일째 쌀 식을 먹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더 먹고 싶은데 약간의 아쉬움을 참고 텐트에서 내일의 계획을 생각해 본다. 앵커리지에서 쌀 구경하고 처음이다.

물론 먼저 내려간 대구. 경북 학생산악연맹팀이 데포 시킨 알파미가 있지만 처음부터 장비의 경량화와 쌀 식을 않기로 마음먹고 국내에서부터 준비도 하지 않았다. 데포해둔 짐을 찾아서 매킨리 빌리지(5,200m)로 가는데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고 춥다. 물을 먹다 수통을 떨어뜨려 버렸다. 빌리지에 도착하니 목포대는 텐트를 치고 나는 너무 추워서 물을 끓이고 설동을 파려고 애써 찾아보아도 눈이 너무 딱딱하고 추워서 설동을 팔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목포대의 텐트에서 하루 신세를 지기로 하고 간식으로 저녁을 때웠다. 잠을 자려고 해도 배가 고프다.

아침 일찍 단팥죽으로 식사를 마치고 출발을 하는데 북사면이라서 햇볕이 들지 않고 강한 바람이 불어대니 손과 발 온몸이 너무 춥고 바람 때문에 400m을 오르다 도저히 전진을 못하고 텐트로 돌아왔다. 다른 팀 내에서 등반에 트러블이 생겨서 서먹서먹해서인지 대원 한명이 데날리 페이스(5,700m)로 가자고 한다. 나는 오늘 쉬고 싶은데, 서울미대팀은 다른 루트로 정상을 등정하고 내려온다. 1시경 출발을 하여 데날리에 도착하니 바람이 날려 보낼 듯이 불어댄다.

 

5월 21일 고소증세도 없고 컨디션도 좋은데 다리에 힘이 없다. 아침 8시경 캠프를 출발하여 능선에 올라섰지만 너무 속도가 느리다. 하루 휴식을 취하기로 하고 데날리페이스 캠프지로 하산하여 쉬면서 휴식을 취하고 내일 정상을 다녀와서 빨리 귀국하여 다음 등반준비를 해야지 하면서 잠이 들었다.

 

5월 22일 능선에 올라서니까 바람이 전혀 불지 않는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없어 갈 수 없을 것 같아 텐트로 들어와서 오늘 하루만 더 쉬면 내일은 정말 갈 수 있겠지 그리고는 계속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물과 음식을 먹지 못해서 피로와 탈진 고소까지 겹쳐서 잠만 잤던 것 같다.

그리고 구조를 당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구조를 당하는 과정에서 의식이 약간씩 있을 때는 너무 춥다. 추운 게 아니라 언다는 느낌이 든다. 왼손이 잘 움직이질 않고, 왼쪽 어깨까지 얼어들어 왔다. 팔 전체가 움직이질 않는다. 오른손 장갑이 미끄러워 장갑을 벗고 당겨서 가슴에 갖다 놓으면 다시 의식이 없을 때는 어떻게 된지를 모르겠다. 그러기를 수십 번 오른손도 얼어들어오고 심장만이 얼지 않고 온몸이 다 얼어들어간 것 같다. 나는 의식이 있을 때마다 외쳤다. 왼쪽 어깨를 조이게 묶은 철사를 풀어 달라고 하지만 들리지 않는가 보다. 비몽사몽 간에 꿈을 꾸었다. 통나무 하나에 묶이어서 사람고기를 먹는 사람들에게 팔려 가는 꿈을 꾸었다. 나를 데리고 가는 사람은 일본 사람과 한국인 1명 얼굴은 빨간색과 파란색(상의 오버트라우저 모자 색깔)으로 덮어지고 소리만 들릴 뿐이다.

아주 험한 산과 계곡을 내려가고 희미한 불빛과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이제는 다 왔구나 싶은데, 나와 같은 사람이 몇 명 있고 팔과 다리 몸통을 부위별로 값이 매겨지고 나는 조금이라도 더 살려고 나를 통째로 사가라고 애원을 했다. 나는 다시 자동차 뒤의 나무에 묶긴 채로 끌려가고 자동차 안은 얼마나 따뜻한지 유리창에는 성에가 끼어서 안이 보이질 않고, 나는 속으로 안에 태워 주었으면 하고 바랬다.

주위에는 눈 덮인 밭고랑과 비닐로 덮어놓은 밭고랑도 보인다. 잠깐씩 비닐 속에 들어가 있을 때에는 따듯했다. 그리고 흙으로도 나의 몸을 덮어 주었다. 몇 차례 비닐속의 따뜻함을 느끼다가 다시 가기 시작한다.

동이 틀 무렵 여자들 소리와 남자들이 주위를 지키고 넓은 바위 위에 올려졌다.

전기톱을 가지고 오는 사람, 그릇을 가지고 오는 사람도 보였다.

희미하지만 고기를 사러 온 사람들은 에스키모인 인것 같다. 나는 또 자르지 말고 통채로 사가라고 애원을 했다. 그렇게 되면 혹시나 주인을 잘 만나서 죽지 않고 어떻게 든 살 수 있는 희망이 있을 것 같았다. 의식이 잠깐 있을 때에는 심장만이 약간씩 뛰고 몸이 전체가 얼었다는 것을 느끼며, 이제 서서히 이렇게 고소에서는 고통 없이 편안히 죽어가는구나 하는 것을 느끼며 살려고 몸부림도 치지 않았다. 그리고 나를 팔아넘긴 등반대원도 마음 아파하는 것을 보았고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었으리라고 생각을 하면서 나는 죽음의 의식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대원이 한번 나를 구해주었다. 시골 정미소 같은 인간 도살장이 수직으로 계속 내려가는데 동물의 내장 속을 통과하는 것 같이 빨간색의 통로였다. 계속 밑으로 내려가니 목재소에서 사용한 거대한 톱이 컨베이어에 밀려서 지나갈 때 톱날이 닿지 않게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발뒤꿈치가 자르려는 그 순간 톱날이 밑으로 내려갔다. 그 친구가 톱날을 밑으로 내렸다. 그래서 잃을 뻔한 목숨을 건졌다. 이렇게 사람이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는구나 하고 생각할 때 어머님이 보이면서 “너는 오래 사니까 걱정하지 마라” 하는 말씀을 남기고는 희미한 안개 속으로 사라지셨다.

그 순간 무의식중에서도 살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의식을 잃었다.

어느 순간 의식이 돌아왔다. 선반처럼 생긴 창고에서 상의가 벗겨진 채로 누워있고 너무도 추워서 춥다는 소리를 했던 것 같다. 비행기를 기다린다는 느낌이 들었고 얼마나 지루한 시간을 보내니까 비행기가 눈발을 날리며 착륙한 것 같더니 알몸에 눈가루를 맞으니 더 춥고 속으로는 괘씸하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따뜻하게 해주지 그리고 또 의식을 잃었다. 목이 말라 옆을 보니 헬기 조종사는 보이지 않고 옆에 군인이 있어서 소리를 외쳤다. 물을 달라고 해도 주지 않는다. 사람을 알아 볼 수가 없고 눈의 초점이 흐렸다. 천장의 줄 같은 것에 매달려있는 영양제 병이 눈에 보였다. 오른손으로 왼손을 들어 올려서 왼손으로 줄을 잡을 수 있게끔 했다. 그러나 왼손은 나의 의지대로 따라 주질 않는다. 나무토막이 되어버린 내 손은 오른 손을 때면 왼손도 내려와 버린다. 옆 사람에게 물을 주면 시계도 주고 돈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반응이 없다. 국방색 백이 보여서 어떻게 해서든지 잡아 보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가까이 접근 할 수가 없다. 그러다 의식을 잃었다. 약간의 의식이 돌아왔다. 한국말을 하는 간호사가 있고 의사도 있는 것 같다.

목이 말라 주스를 4컵 정도 먹었던 것 같고 손에 피부를 일부 벗긴다는 소리와 사인을 해야 한다는 한국 간호사의 이야기를 듣고 사인을 부탁하고, 아주 넓은 스테인리스 물통 속에는 따뜻한 물이 있고 알몸으로 그 통속에 넣어지고 편안하고 노곤함을 느꼈다. 4~5명의 간호사들이 마사지를 한것 같다.

그리고 10일 후쯤 깨어났으나 사람은 알아보지 못하고 형체와 목소리만 듣고 일어서지도 못하고 침대로 쓰러지곤 했다. 그 후로는 음료수를 많이 먹었던 기억과 먹다가 흘리고 소변을 제대로 보지 못하여 흘리고 해서 희미한 기억이지만 여자 간호사에게 혼나게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몰랐고 손가락을 절단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발뒤꿈치를 절단했는가를 확인했던 것 같다.

시간이 갈수록 열 손가락이 새까맣게 말라 들어오면서 손이 오그라든다.

손가락을 절단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치료하면 좋아질 거라고만 생각했다.

한 달이 지난 후 절단을 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 들였다.

그리고 이보다 더 상은 나빠지지 않겠지, 의사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열 손가락이 없어서가 아니고 앞으로 등반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참을 수 없는 아픔으로 다가왔다.

손가락은 하나도 없고 손등과 손목을 연결해주는 관절뼈도 없고 하얀 근육만이 가느다랗게 보이고 금속으로 연결을 시켜 놓았다. 허벅지에서 이식한 피부가 계속해서 까맣게 말라 들어간다. 2개월 동안 여섯 번의 수술이 끝났다. 조금이나마 기운을 차리려하면 전신마취에 계속된 수술 의사 선생님께 제발 고통스러우니 절단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제 마지막 수술이라면서 회복이 어려우면 손목을 절단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식한 일곱 번의 수술 후에야 지금의 손을 만들 수 있었고, 손목을 절단하지 않고 손가락은 없지만 손의 귀중함을 아는 의사분이기에 생활에 최대한의 불편이 없도록 손을 만들어 준 의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후일에 들은 이야기지만 뇌부종과 폐부종까지 걸려서 죽지 않고 깨어난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한국의 가족들에게 살아나기 어려울 것 같으니 시신을 인도할 준비를 하라고 통보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은 일상생활에 잘 적응하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또한 살아가는 방법을 몸소 가르쳐 주는 것도 먼저 다친 산 선배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

처음에는 창피하고 옆에서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화장실이나 문밖에도 나갈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서 양말도 신고 자동차 운전도 하고 이 정도의 글씨도 쓰고 다시 산을 찾아 산행을하며 등산학교에 들어가서 후배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행복은 항상 나의 옆에 있다. 처음으로 혼자서 팬티를 입고, 뺀지를 이용하여 양말을 신고, 대. 소변을 혼자 가리고, 문을 열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혼자서 울었던 기억들이 엊그제처럼 생생하다.

 

내 기억은 없지만 데날리페이스(5,700m)에서 의식을 잃고 텐트에 누워만 있을 때 끝까지 함께해준 목포대학교 85학번 김재명후배, 병원치료비를 무료로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 와실라에 살고계신 오갑복선배와 형수님, 알래스카 교민 여러분들, 손의 소중함을 알기에 7번의 대수술을 마다하지 않고 지금의 손으로 만들어주신 알래스카 앵커리지 프로비덴스병원 닥터 오말리, 중환자실의 저를 정성껏 간호해주신 간호사분들, 16시간 동안 추위와 싸우면서 밤새 끝까지 몸을 아끼지 않고 구조를 해 준 구조대원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게 용기와 도움을 주신 박명선 선배님 사고 후 1년 정도밖에 안된 저를 무등기업과 전성기공 전산실에서 일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다. 신혼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잘못된 생각을 할까봐 광주집에서 함께 생활을 하며 운전면허를 취득하게 해준 서영대학교 김영학형님과 형수님, 그리고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많은 분들의 격려와 성원이 있었기에 가능 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다가

1997년부터 시작하여 7대륙 최고봉을 2009년에 남극대륙 등반을 끝으로 완등을 했다.

그리고 가슴에 묻어버린 사고이전의 나의 꿈 2006년부터 시작한 8,000m 14좌 꿈을 하나하나 이루어 현재 12개 봉우리를 등정했다. 앞으로도 어렵고 힘든 난관이 닥쳐도 1%의 가능성만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누군가가 아닌 내가 끝까지 오르겠다는 당찬 목표도 갖고 있다. 행복은 항상 나의 옆에 있다. 처음으로 혼자서 팬티를 입고, 양말을 신고, 문을 열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혼자서 울었던 기억들이 엊그제처럼 생생하다. 그래도 아쉬움은 남는다. 신발 끈을 묶지 못해서 정상으로 향하지 못하고 베이스캠프로 하산을 해야 했던 상황, 등반 중 소변을 보는 게 힘들어 물을 먹지 못한 그때가 아쉽기도 하다. 혼자 옷에다 소변을 보며 이틀 밤을 비박하며 살아 돌아온 기억들, 하지만 이젠 나에게도 꿈이 있고 희망의 전도사로서 마땅히 내가 해야 할 귀중한 삶이 기다리는 것이 나를 기쁘게 하고 행복한 꿈을 매일 꾼다.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이 아름답고 행복해 보인다.

이제야 행복을 느끼는 걸 보면

“삶은 처절할수록 아름다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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