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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홀드 메스너/등반은 높이보다 자신의 스타일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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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희망만들기 댓글 0건 조회 2,958회 작성일 19-05-15 18:04

본문


라인홀드 메스너/등반은 높이보다 자신의 스타일이 중요하다


1950년 프랑스의 모리스 에리조그가 안나푸르나8091m 정상을 밟으면서 시작된 히말라야 8000m 초등 레이스는 1964년 시샤팡마8046m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새로운 스타일의 등반활동이 히말라야에서 펼쳐졌다. 

1986년 10월 16일 이탈리아의 라인홀트 메스너는 42세의 나이로 로체8516m 정상을 밟았으며 히말라야 8000m급 고봉의 첫 완등이란 위업을 달성했다. 특히 메스너는 알프스에서의 등반 스타일인 ‘알파인 스타일’을 히말라야에 적용시켜 1978년 에베레스트8850m 무산소 등정, 1980년 단독 등정, 1982년 한 시즌 3개봉(칸쳉중가·가셔브룸 2봉·브로드피크) 연속 등정, 1984년 가셔브룸 1봉8068m과 2봉8035m의 종주 등반에 성공했다. 

히말라야 등반은 메스너에게 있어 위대한 도전이며 산에 있는 그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산을 경쟁 상대로 삼지 않았고 등반을 하나의 투쟁으로 보지 않았다. 단지 즐겼을 뿐이다. 

“메스너는 8년간의 준비 끝에 낭가파르밧8125m 단독 등반을 강행해 성공을 거두었으며 사람들은 메스너를 부러워했다. 그러나 그의 성공 자체를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등반 스타일에 대해 부러워해야 한다.”고 이야기한 독일의 권터 슈트롬의 말처럼 그의 등반 스타일은 당신 산악인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참다운 목표는 최고의 한계점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완성이야말로 끝없이 무한한 것”이라고 말했다. 

메스너는 히말라야의 위대한 자연 속에서 ‘칼리페(티베트 어로 침착한 발걸음)’를 내디디며 자신의 꿈을 차근차근 실현했다. 16년간의 히말라야 원정 속에서 항상 도사리고 있는 위험과 고독·불안·절망을 뛰어넘어 인류에게 희망과 꿈을 안겨주었다. 

지난 5월 27일부터 29일까지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열린 에베레스트 등정 50주년 기념행사에는 에드먼드 힐러리 경을 비롯해 에베레스트 최초 여성 등정자인 일본의 다베이 준꼬, 라인홀트 메스너, 아시아인으론 최초로 8000m급 14좌를 모두 오른 엄홍길 씨 등 세계적인 산악인들이 몰려 들었다. 

그 현장에서 세계적인 등반가 라인홀트 메스너59세를 만나 그의 등반 철학과 인생에 대해 들어 보았다. 

1970년 낭가파르밧 루팔벽 초등을 시작으로 히말라야에 첫 발을 내디뎠는데 당신의 새로운 등반 스타일은 현대 등반사를 바꿔 놓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그러한 등반 행위에 대해 찬사와 함께 질시와 비난도 많았던 것으로 안다. 

1944년 북 이탈리아의 돌로미테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949년부터 바위에서 놀면서 자연스럽게 암벽등반을 시작했다. 나의 산악활동은 20대 중반까지 알프스에서의 암벽등반 활동과 그 후 40대 초반까지의 히말라야 8000m 고봉 등반으로 나눌 수 있다. 

1969년까지는 자나 깨나 알프스에만 몰두했다. 1953년 독일의 헤르만 불이 초등한 낭가파르밧은 독일인에게는 특별한 산이다. 

1968년 낭가파르밧 독일원정대에 참가한 산악인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성공하리라 믿었지만 알프스에서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히말라야 8000m 고봉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히말라야에서의 등반 활동은 초기에는 주로 어려운 산이 대상이었다. 

그러나 낭가파르밧과 마나슬루8163m를 오른 후, 내 자신에 맞는 스타일의 등반을 추구하려고 마음먹었다. 그것은 당시 원정대의 자금을 구하기 어려웠다는 것이 큰 이유 중 하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알프스를 오를 때처럼 자신이 직접 장비를 짊어지고 오르는 ‘알파인 스타일’이었다. 

1975년 오스트리아의 피터 하벨러와 함께 알파인 스타일로 가셔브룸 1봉을 오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애초부터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을 꿈 꾼 것은 아니고 알파인 스타일을 추구했기 때문에 얻은 결과다. 당시 나는 ‘인간이 8600m에서는 산소 없이 활동할 수 없다’는 일반인들의 상식을 깨버렸다. 그들의 믿음을 허물어 버렸으니 많은 질시가 뒤따르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나.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는 것에는 이제 익숙하다. 

나는 등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던 고전적인 등반가는 아니다. 대신 ‘창조적인 정신Mental Power’을 중요시했다. 

내 신체조건은 남들보다 뛰어나지도 않다. 그러나 도전하려는 능력이 뛰어났고 목표를 정하면 끝까지 이뤄내려는 성취욕이 강하다는 것이 남과 다른 것 같다. 그리고 1980년대 들어와서는 남들이 시도하지 않은 등반행위인 한 시즌 3개봉 등정과 2개봉 종주 등반을 시도했다. 결국 성공했으며 1984년 여름 이탈리아의 한스 카머랜더와 함께 해낸 가셔브룸 1봉과 2봉 종주 등반은 아직도 깨지지 않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8000m 14개 봉을 모두 등정하고 자서전에서 ‘등산의 참다운 기술은 살아남는데 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16년간 히말라야의 8000m급 봉우리를 오르면서 수많은 위험에 직면했을 텐데 가장 어려웠던 순간은 언제였나? 

낭가파르밧 루팔벽 초등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성취감을 느낀 사건이면서 가장 힘들었던 곳이다. 히말라야에서 가장 길다는 루팔 벽은 전문적인 지식이 없으면 위험에 빠지기 쉬운 코스다. 

10분 간격으로 눈사태가 쏟아지고, 위에 신설이 내리면 오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체력보다는 지식과 경험이 필요하다. 그곳에서 나는 동생 권터의 죽음을 보았고 3일간 로프나 식량은 물론 다른 사람의 도움도 없이 최악의 상황에서 하산했다. 당시 모든 조건은 우리들을 죽음의 궁지로 몰아 넣었다. 지옥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1986년 10월 16일 한스 카머랜더와 로체 정상을 밟았을 때 어떠한 느낌이었나?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날씨가 좋아서 3일간 운행 끝에 정상을 밟았으나 갑작스럽게 바람이 엄청나게 불고 나빠진 기후 때문에 내려가야 한다는 일념밖에 없었다. 베이스캠프에 내려와서야 ‘나만의 스타일에 의한 등반이 끝났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리고 8000m 등반을 다시는 하지 않았다. 당시 나의 유명세로 보아 히말라야 원정을 꾸린다면 쉬웠겠지만 또 다른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이 내 앞에 펼쳐진다는 생각에 히말라야 등반의 꿈은 접었다. 1990년대 들어 북극점 횡단이라는 또 다른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세계 산악계의 흐름은 당신의 8000m 14좌 완등 이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14좌를 완등할 당시와 근래의 알피니즘은 어떠한 변화가 있나, 그리고 히말라야 원정에 대해 젊은 산악인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는가? 

1986년 이후 원정대 규모가 커지고 원정 팀도 많아졌다. 같은 노멀 루트를 올라가도 70~80년대의 셰르파는 짐만 옮겨주었으나 지금은 대부분의 등반가들이 셰르파가 깔아 놓은 길을 따라 등반하고 있다. 이것은 진정한 히말라야 등반이 아니다. 예를 들어 에베레스트의 경우, 당시에는 아이스 폴에 사다리를 놓거나 루트를 보수하는 것도 등반가들이 직접 했지만 요즈음은 셰르파가 이러한 일들을 한다. 

올 시즌 에베레스트에서는 8500m의 사우스 콜까지 수십 명이 올랐으나 마지막 구간에 로프가 깔리기만을 기다려 서로 눈치만 보다 셰르파가 마지막 구간에 로프를 깐 후 등정했다고 한다. 로프 없이 에베레스트의 마지막 관문인 힐러리 스텝을 넘지 못한다면 진정한 산악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셰르파의 힘을 빌려 등반하는 상업등반대는 산악인이 아니다. 등반가가 자신의 일을 셰르파에게 맡기고 산을 오른다면 이것은 등반이 아니라 관광일 뿐이다. 올 시즌 에베레스트를 오른 등반가 중 40%는 관광객이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진정한 성취감’을 맛볼 수 없다. 

자신의 의지로 위험과 어려움 등 온각 난관을 헤치고 정상에 올라야 희열을 맛볼 수 있다. 등반가 자신이 스스로 루트 공략을 하는 것이야말로 히말라야 등반에 있어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산은 움직이지 않고 항상 거기에 있다. 젊음은 다양한 방법으로 산을 오를 수 있는 기회가 많다. 어떻게 올라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능력에 맞게 오르는 것이 중요하다. 


그동안 폴란드의 예지 쿠쿠츠카를 비롯한 10명의 산악인들이 메스너의 뒤를 따라 14좌를 완등했다. 한국은 1962년 처음으로 다울라기리 2봉7751m에 정찰대를 보내면서 히말라야에 첫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40여 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14좌 완등자를 두 명이나 배출했다. 한국산악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국산악계는 1972년 마나슬루에서 원정 등반으론 가장 큰 사고를 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나는 마나슬루 남쪽 사면에 있었고 한국 팀은 북쪽 사면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했다. 북쪽 사면은 난이도가 쉬운 대신 바위가 많고 위험에 노출된 루트였고 남쪽 루트는 코스가 어렵지만 덜 위험했다. 눈보라와 함께 엄청난 눈사태가 일어났고 다행히 나는 운이 좋아 변을 당하지 않았다. 그 후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한국의 엄홍길 씨가 2000년 K28611m를 끝으로 8000m 14좌 완등에 성공한 것도 알고 있다. 이번 시즌 에베레스트 첫 등정자는 엄홍길 씨다. 당시 엄 씨가 티베트에서 올라 정상을 밟았을 때 나는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 

한국은 암벽등반을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산이 많다고 들었다. 그리고 히말라야 원정은 나라의 경제성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국 산악계가 경제 성장을 발판으로 히말라야에서 펼치는 활동이 이를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모습들이 너무 아름답다.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은 곳을 가라’고 권하고 싶다. 등반은 높이가 아니라 자신의 스타일이 중요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지나간 길을 똑같이 걷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지금 도전해보라. 등반가가 힐러리 경처럼 에베레스트를 등정했다는 것만으로 자아도취에 빠지는 것은 잘못이다. 


언제 8000m 14좌 완등이라는 목표를 세우게 됐는가? 그리고 당시 폴란드의 예지 쿠쿠츠카와 마르셀 루디에는 14좌 완등이라는 골인점을 향해 당신을 추격했다. 당시 어떤 생각을 했는가? 

쿠쿠츠카나 루디에 모두 훌륭한 산악인이다. 그러나 그들은 훨씬 늦게 히말라야에 발을 들여 놓았기 때문에 나보다 먼저 14좌를 완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나는 한번의 등정으로 만족하지 않았고 같은 산이라도 다른 코스로 정상을 밟으려고 노력했다. 

처음부터 14좌 완등을 목표로 히말라야를 찾은 것은 아니다. 그전에는 불확실하다고 생각했지만 1982년 한 시즌 3개봉 등정에 성공하면서 8000m 14좌 완등도 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쿠쿠츠카는 1980년대 가장 뛰어난 등반가였다. 2주 동안 설동을 파고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렸다 등정하는 등 어려운 상황에 부딪혀도 그것을 뛰어넘었던 훌륭한 산악인이었다. 만일 내가 히말라야 등반 중 변을 당했다면 쿠크츠카가 현재 나의 위치에 올랐을 거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루디에는 1986년 마칼루 등반 중 사망했고, 쿠쿠츠카는 1987년 두 번째로 8000m 14좌 완등에 성공했으나 1989년 가을 로체 남벽을 등반하던 중 추락사 했다.) 


1988년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린 겨울 올림픽에서 IOC는 메스너와 쿠쿠츠카에게 메달을 수여했으나 당신은 거부했다. 왜 거부했으며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는지? 

메달을 받는다는 것은 등반이 경쟁임을 자인하는 것과 같다. 수영이나 스키 등은 경기지만 산을 오르는 것은 경기가 아니다. 

그리고 산을 오른다 해도 루트가 각기 다른데 어떻게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있겠나. 이것이 내가 수상을 거부했던 이유며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동안 두 명의 동생을 산에서 잃었다. 특히 권터의 죽음은 당신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던 것으로 안다. 지금도 그 마음의 짐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추억과 흔적은 세월이 흘러도 잊지 못하는 법이다. 권터는 바로 아래 동생으로 나의 영원한 자일 파트너였다. 

산도 잘 올랐고 낭가파르밧을 같이 등정하다 하산길에 죽었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아프다. 지난해 권터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벌거벗은 산The Naked Mountain>을 출간했다 권터가 죽은 지 32년이 지났지만 그를 생각하며 책을 썼을 정도로 아직도 동생을 사랑한다. 권터의 죽음은 나의 책임이었고 아직도 내 마음 속에는 살아있는 존재로 남아 있다. 지금 살아있으면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고 가끔씩 생각해 본다. 

지그프리트는 1985년 알프스에서 가이드를 하다 번개에 맞아 목숨을 잃었고, 당시 티베트에 있었던 나는 몇 개월 후에 그 사실을 알았다. 


이제 예순 살의 나이를 바라보게 됐다.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계획은 무엇인가? 

북 이탈리아의 자그마한 마을에서 1살짜리 어린 막내를 비롯한 다섯 식구가 40마리의 야크를 키우고 농사를 지으며 아주 평범하게 살고 있다. 4명의 자식 중 가장 큰 아이는 22살로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현재 내 인생의 중심은 아이들이다. 사람은 나이에 맞게 자신의 생각을 바꿔가며 살아야 한다.

61살이 되는 2005년부터는 또 다른 삶이 나를 기다릴 것이다. 사막을 횡단할 계획을 세워 놓았다. 아마도 무척 바쁠 것 같다. 

그는 ‘히말라야 설산에 올라 눈구덩이를 파고 요기 생활을 해볼까 한다’는 농담을 끝으로 인터뷰를 마쳤다. 


http://www.emount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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